
슈만은 쯔비카우 태생인 독일의 작곡가이다. 부친은 저작가이며 서적상, 모친은 유명한 의사의 딸로서 교양이 높았다. 부친의 책방에서 음악 서적을 읽고, 또 바이런, 리히터 등의 문학이나, 칸트 등의 철학을 연구하여 문학적인 교양을 쌓았다. 피아노는 11세 때에 학교나 가정의 살롱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으나, 부친이 사망한 뒤, 1828년에 모친의 뜻으로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1830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했다. 이 무렵부터 음악을 전공하려는 희망이 특히 강해져서, 가을에 라이프찌히에 돌아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한편, 작곡을 도른에게 공부했다. 그러나 피아노의 무리한 연습 때문에 손가락을 다쳐, 그 이후로 작곡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초기의 작품은 모두 피아노곡으로 되어 있다.
1834년에는 친구와 음악 신보를 발간하여, 진보적인 음악 운동의 변호를 위해 가공적인 ‘다비드 동맹’을 결성하여, 슈만은 플로레스탄 혹은 오이제비우스라는 필명으로 평론의 필치를 날렸다. 1836년에 은사인 비크의 딸이며 여류 피아니스트로 유명해진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비크의 맹렬한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1840년에 소송 사태까지 이르는 장애를 거쳐 마침내 결혼했다. 이 결혼한 해에 예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고, 또 수많은 가곡을 써서 소위 가곡의 해를 실현시켰는데, 이 해만으로 133곡의 가곡을 썼다. 결혼한 후 창작 분야는 더욱 확대되어,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작곡에 손을 대게 되었다. 1843년에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으나, 본래가 신경질이었던 슈만은 정신 착란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844년에 클라라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했을 때부터 병세가 악화되었고, 드레스덴에 정주하여 개인 교수와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1850년에 뒤셀도르프에서 지휘자로 초청되었으나, 정신 착란증이 심해져 그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으며, 클라라의 극진한 간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맡은 직책을 중도에서 사직했다. 1853년에 청년 작곡가 브람스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리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듬해인 1854년 2월 6일에 갑자기 라인 강에 투신 자살을 꾀하여, 구조된 후 엔데니히의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다. 그 뒤 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나날을 보내다가, 2년 후인 1856년에 46세로 애석히도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피아노곡과 가곡으로, 시정과 환상성이 음악과 적절히 연결되고 있다. 교향곡과 같은 대곡에서는 구축성의 부족과 관현악법의 역량 부족 때문에 진가가 발휘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가곡과 피아노곡에 있어서는 전기 낭만주의 시대는 물론이려니와, 독일 정신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의 화려한 시대의 특징 있는 작곡가로서, 또 그 지도자적인 존재로서 손꼽히고 있다.
Robert Alexander Schumann
